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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독서후기] 우리 사회에서 '당사자'가 된다는 것 (정일영)

작성자
정일영
작성일
2017.07.20
첨부파일0
조회수
1983
내용

이 글은 2015년 4월 허핑턴포스트(현재는 허프포스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ilyeong-jeong/story_b_6642204.html 

 

 

권성현, 김순천, 진재연 엮음, 삶이보이는창 르포문학모임,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지원대책위원회 기획,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 후마니타스, 2008
 

우리 사회에서 '당사자'가 된다는 것

 

그러니까 벌써 8년 전이다. 내가 살던 마포구의 대형 마트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이 파업은 이전에 우리가 생각하던 파업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래서 나도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마련한 주점에 가기도 했고, 후원 기금에 약소한 돈을 보태기도 했다. 그리고 불매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상처를 남기고 협상이 '완료'된 후, 8년. 이제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도 어느새 잊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년 개봉했던 영화 [카트]를 보았고, 파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사놓았던 이 책을 이제서야 꺼내 읽었다. 당사자들에게는 소중한 기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기억하기 싫은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이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또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분석할 하나의 '텍스트'로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 당시 사회문제로 조금씩 언급되기 시작했던 비정규직 문제가, 이제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문제, 아니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상의 문제는 매 순간 살갗에 와닿는 것이지만,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조희숙 씨는 동네에서, 이마트에서, 할인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엄마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희숙 씨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세세하게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처음에 나는 희숙 씨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언어의 시계를 희숙 씨에게 맞춰 느.리.고.깊.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킨 일상 속에 깊게 박힌 '고통'에 대해서, '모욕'에 대해서, 그것은 너무 세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의미와 가치를 포착하기 힘든 것이었다.

다행히, 당시의 투쟁은 지역과의 연대를 통하여 그나마 기록되고 기억될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산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아직 투쟁이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놀라울 정도로 균형 감각을 잃지 않고 책을 편성했다는 것이 놀랍다. 즉, 투쟁의 정당성만을 부르짖는 책이 아니라, 우리 시대 노동운동의 한계와 그 한계를 딛고 나아가야 할 지점까지 이야기하는 책인 것이다. 물론 당연히 어떤 정답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 책이 유효한 것은 좋은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의 특징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직도 이 부분을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 SNS를 뜨겁게 달구었던 페미니즘 논쟁(발화점을 생각해보면 논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하지만)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성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 않은, 혹은 덜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여성 노동자는 환영의 대상이지만, 조직 내에서 여성의 권리 혹은 차별 반대를 이야기하면 거시적인 안목 없이 분열을 조장하는 이기주의자로 낙인 찍는다. 특정 계급 혹은 성별이 극도의 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권리 주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발언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얼마 전 어떤 사업장에 연대 투쟁을 갔는데 한 남성 동지가 그러시더라고요. 기륭 동지들은 아저씨가 벌어오지 않냐고... 여성들이 일하는 걸 보조적인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다른 한편 투쟁의 장기화에 따라 가족 간 불화, 자녀 교육 문제, 생활 패턴 변화 등 가족 문제에 대해 '알아서 해라' 내지 '감내해야 할 문제'라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은 노조의 일은 '공적 영역'이며, 개별 조합원의 가족 문제는 철저히 '사적 영역'으로 분리하는 사고를 보여 준다. 이렇게 가족 간의 불화나 갈등으로 고민하는 조합원들을 노조와 지도부가 방치했던 것은 가족주의 문제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드러내 준다. 이는 노동운동이 여전히 조합원들에게 노동자로서 정체성은 부여하지만, 자율적인 주체로서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성별, 고용 형태, 학력 이런 것들로 노동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자본의 방식을 노동자인 우리가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약한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통한 나의 존재를 키우는 방식이었다.

마찬가지로 투쟁의 방식에 대한 시선도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사는 동네의 시장인 망원시장과 월드컵시장에 투쟁 문구가 나붙고 상인들이 '조끼'를 입었던 때가 있었다. 월드컵경기장의 대형마트에다가 합정에도 대형마트가 들어섰고, 또 거기에 더해 그 사이에는 대형마트의 소형지점이 영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투쟁가나 강한 투쟁 문구 등을 보고는, 이제 저런 감각으로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젠 오히려 그런 '강성적'인 문구나 목소리를 되려 불편하게 여기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일이 많으니까. 그러나 틀린 말이다. 정말, 정말로, 부드럽게 말하면 누군가가 듣고, 무엇인가가 바뀔까? 두 사내가 이 엄동설한에 굴뚝에 올라가지 않아도 무엇인가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목숨을 걸고 고공에 올라가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그 극단의 행위를 두고, "저들이 극단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민주화된 공론장'에서도 배제를 겪기 일쑤인 이들 처지에서, 우악스런 팔뚝질로 표상되곤 하는 '거리의 정치'는 불가피하면서도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다.

슬프게도, 그건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더 슬프게도,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점점 나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굳이 또다시 늘어나는 비정규직의 비율과 심해지는 차별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사자'라고 콕 찍어 말하기엔 이제 비정규직 문제는 일상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하루에 만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한 번 적어보라. 정규직이거나 고용 안정성이 보장된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투쟁이 자꾸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싸움으로 인식할까 봐 걱정이에요. 모든 사람이 함께 나서서 풀어가야 할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문제,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 당사자만 피해 보는 문제로 생각하게 될까 봐 걱정인 거죠.

그러므로 다시, 우리는 연대를 꿈꾸어야 한다. 자본이 연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연대해야 한다. 노동조합, 지역사회, 사회단체가 특정 사안을 두고 합의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계속 만나고 손잡고 부딪혀야 한다. 누군가가 대신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우리가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시위현장에서만 벌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당신이,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꽤나 많다. 이 싸움은 동시다발적인 국지전이어야 한다.

노조와 지역 사회운동, 사회단체 등이 지역의 이데올로기 지형과 일상에서 지역민들이 타자로 여기던 불안정 노동자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에 '균열'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지역 주민들은 이랜드 투쟁을 목도하면서, 이들의 삶의 공간인 마트가 자신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공간이 아닌,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주민이자 노동자로서 일하는 공간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대의를 내세워 소수자를 침묵하게 만들지 않는 것. 괴물을 비난하며 괴물이 되지 않는 것. 홈에버 파업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을 되씹어야 한다. 그래야만 계속되는 투쟁들이 '잊혀진 투쟁'으로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은 우리 모두의 일임에도 가장 약자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 말았던 그 무책임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가 앞서는 싸움은 패배할 확률이 크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앞에 가득한, 그런 싸움이야말로 이길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뒤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당사자가 아니기에 싸울 힘이 있는 거니까. 당신도 알고 있듯이, 이 사회에서 자신이 당사자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이미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작년 거대한 참사 앞에서 벌어지는 일로도 충분히 그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같이 하라는 얘기는 감히 안 해요. 저도 옛날에 그랬어요. 차도를 막고 여러 사람한테 불편을 끼치고 투쟁을 하는 게 불편하고 짜증도 나겠지만. 저 사람들이 왜 저럴까. 저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죽하면 저럴까 한 번쯤은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그 정도? 우리 입장이 되어 달라고는 절대 안 해요. 입장은 누구나 다르니까요. 흔히 생각하듯이 우리만 잘살겠다고 그런 것도 아닌데. 월급 많이 달라고 싸우는 것 아니잖아요.
여러 사람한테 우리가 빛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그런 말 들으면요, 지금은 그럼 우린 뭐야, 다른 사람한테 빛이고 희망이고, 우리는 왜 이렇게 구렁텅이에 들어간 기분인 건데. 우리는 뭐야, 남만 다 빛내 주고 우리는 왜 이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토록 명확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사실'은 매번,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이제까지의 비극은 어떤 결론이 아니라 징조일 수도 있다. 너무 늦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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