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처럼 퍼져나갈 노동자 ‘역사쓰기’
1.
언젠가는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글들을 묶은 책이 나왔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노동자들이 쓴 <<들꽃-공단에 피다>>이다. 바쁘다고 미뤘던 책을 펼쳤다. 손을 놓지 못하고 단숨에 다 읽었다. 한 사람의 글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궁금하여 계속 읽게 만들었다. 아사히 비정규직 지회는 2015년 5월 29일 구미에서 처음으로 만든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한 달 만에 170명이 문자해고 통보를 받았다. 희망퇴직과 생계문제로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22명이 남아 지금도 2년 넘게 싸우고 있다.
아사히 비정규직 지회에 강의도 가고, 집회에서도 보고, 농성장에서 인사도 나눴지만 몇 사람을 빼고는 내게 늘 ‘아사히 노동자들’이자 ‘동지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만났던 조합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들은 김성한, 김정태, 조리담당 짬장, 남기웅, 민동기, 박성철, 박세정, 송동주, 안진석, 오수일, 이명재, 이민우, 이영민, 임종섭, 장명주, 전영주, 조남달, 차헌호, 최진석, 한상기, 허상원, 황태섭이다.
서로들 모르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조합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기 전까지는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고, 오랜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서로 이름조차 몰랐다고 한다. 책에는 조합원 각자가 아사히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묻혔던 비정규직의 역사가 드러나고, 직접 몸으로 느낀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이 어땠는지,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서 회사측이 구미시와 공권력 그리고 ‘김앤장’을 끼고 노동자들을 어떻게 탄압했는지, 지배계급의 사슬을 보는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목소리들이 생생하게 실려 있다. 책을 보면서 공식문건에서는 바로 다가 오지 않던 아픔과 분노가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사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는 이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삶과 다를 바 없다.
2.
아사히 노래패가 노래를 하고 율동패가 몸짓을 보여주면 잘 한다고 박수를 쳤으나 함께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동작을 통일 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이명민), 어깨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어떻게 감내해야 했는지(장명주) 무대 뒤쪽의 애환은 잘 몰랐다. 손재주가 있던 이민우는 농성장을 만들고 보수하는 일이나 현수막을 직접 쓰는 작업을 도맡아 하게 되어 ‘이반장’이 되었다. 공장에서 일할 때 뒤풀이 안주를 잘 만들던 ‘짬장’은 천막 주방장으로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는 주부의 마음을 실감하는 농성장의 ‘엄마’가 되었다. ‘농성장 동지들이 손꼽는 인기 메뉴 베스트 3’로 닭발 10인분, 야채찜닭 10인분, 닭개장 50인분 레시피까지 올려 놓았다. 이발사 출신 조남달은 농성장 이발사를 넘어 ‘이발 연대’를 통해 연대의 중요성을 알리는 연대의 전도사가 되었다.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연대의 노동이 얼마나 뿌듯한 기쁨을 주는지 그림을 보듯 다가온다.
일본 원정 투쟁 중에 4박 5일 동안 힘든 내색 없이 연대해준 일본 동지들을 보며 민동기는 연대가 필요한 곳은 언제든지 달려가겠다고 다짐한다. 울산과학대 농성장 강제 철거를 막으러 달려갔던 이명재는 울산에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이 얼마나 많고, 대공장 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이 수만 명이 있는데 철거를 막는 데 온 사람이 고작 40명인데 절망하지만 진정한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며 구미의 금속노조 KEC 지회가 없었다면 아사히 비정규직지회가 이렇게 싸울 수 없었을 거라고 고마워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생존은 가족의 생계와 직결된다. 해고는 가족의 걱정과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해하고 지지하는 가족들에 얽힌 사연들도 눈물겹다. 상경투쟁 후 췌장염으로 입원했다가 뼈에 암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던 박성철은 아내가 투쟁을 그만두라고 하지 않아서 고마웠다고 한다. 그리고 TV에서 촛불집회 장면을 보면서 “다치지 마래이!”하던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아빠 돈 있냐?” 묻고는 “내 용돈 좀 줄라고. 아빠 돈 없잖아.......세뱃돈 받은 거 있는데”하는 대화를 소개한다. 조마조마 했는데 암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이 대목에서 간암에 임파로 전이까지 됐던 내 항암의 시절이 떠올라 한참 동안 책을 덮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책을 단숨에 끝까지 읽은 것은 아니었다. 조직부장을 맡은 허상원은 꼭 이길 때까지 참아주겠다는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3된 딸이 원하는 학원 등록을 바로 못 시켜준 것이 후회스럽지만 지금 투쟁에 쏟는 열정을 투쟁이 마무리 된 후 가족과 아내에게 쏟겠다고 약속한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떠나는 동료들이 늘어나고,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과 갈등이 때때로 밀물처럼 들이 닥칠 때가 있을 것이다.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서로에 대한 배려와 동지애가 중요한 버팀목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현장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안진석은 어려움을 돌파할 무기가 함께하는 삶의 방식과 이타적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며 감히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진정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가 되고 싶어서 “나는 노동자”라고 외친다.
최규석의 만화 <<송곳>>에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라고 하는 명장면이 나온다. 투쟁하는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인생의 긴 여정에서 보면 지금 ‘송곳’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싸움이 이 땅 천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싸움이라는 점에서는 1931년 을밀대 지붕위에서 고공농성 일인시위를 벌였던 ‘강주룡’이기도 하다.
3.
차헌호 지회장은 “지금 우리는 승리만큼 소중한 투쟁의 과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다”고 글을 마쳤다. 나는 아사히 비정규직 지회 노동자들이 쓴 이 책이야 말로 투쟁 과정의 산물이며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을 담아낸 소중한 성과물이라고 본다. 스스로 글을 써서 기억을 기록하는 일 또한 투쟁이기도 하다.
?<1984년> 소설에서 조지 오웰은 누가 과거의 기억을 지배하느냐, 과거의 기억을 지배하는 자들이 현실과 미래를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지배 계급이 계급 지배를 관철하는 힘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기억, 기록을 지배하고 역사를 장악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노동자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 노동자가 자기의 역사를 기억하고 지배하는 방식의 하나가 ‘노동자 자기 역사쓰기’이다. 이제까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개인이 투쟁의 경험을 직접 기록하거나 구술을 바탕으로 누군가 정리한 글, 취재를 바탕으로 쓴 르포 같은 글쓰기는 무수히 많았다. 역사 쓰기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들이다. <<들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투쟁 과정 중에 모두가 함께 썼다는 점에서 새롭고 소중하다. 프로 사진가 이상엽 씨는 기록 사진을 찍을 때 잘 찍는 프로가 혼자 아무리 잘 찍어도 아마추어 몇 명이 찍은 사진 만큼 구석구석 골고루 못 본다고 했다. 이 책은 투쟁하면서 인상 깊은 경험과 맡았던 역할을 나누어 씀으로서 널리 깊이까지 기록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사’이면서도 전체의 흐름을 구성하는 ‘전체사’가 되었다. 개인과 집단이 따로 이면서 전체가 되는 공동 집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책을 쓰는 일을 거들어 주었던 ‘전국불안전노동철폐연대’의 노고도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3부에 실은 ‘구미공단 산업 변화와 아사히 비정규직 노조’(천용길), ‘아사히 투쟁과 법.제도’(이경호), ‘공공.행정의 뒷짐 속에 파괴되는 노동과 삶’(신순영), ‘전범기업 아사히글라스와 악마 변호사 김앤장’(안명희), ‘노동자는 하나다! 품앗이를 넘어 공동투쟁으로’(초희)는 ‘아사히 투쟁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정리해서 알려주었고, 토막토막 떨어져 있는 조합원들의 글이 투쟁의 전 과정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노동자들의 역사를 써주는 것을 넘어 옆에서 함께 ‘같이 쓰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4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이 투쟁에 승리한 뒤 <<들꽃>>2를 쓰기 바란다. 이 책을 쓰고 난 이후의 이야기 뿐 아니라 투쟁 과정이라 못 썼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할 사연들, 투쟁 과정에서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일, 보람 있고 기뻤던 일들 중심으로 써도 좋겠다. 그리고 ‘들꽃 2’ 책 제목도 내 맘대로 <<들꽃 2, - 꽃씨 공단에 퍼지다>>로 붙여 보았다. 아사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척박한 구미 공단에 꽃 피운 들꽃이 “정리 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3권 쟁취!”라는 튼튼한 씨앗을 맺어 널리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뜻이다.
책에서 이명재는 “연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손 한번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하였다. 이 책을 부지런히 읽고 주위에 권하는 일도 아사히 노동자들이 승리를 앞당겨 ‘들꽃 2’를 빠른 시간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연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도 책을 읽기 전에 열권을 구해서 사람들에게 권했고, 책을 읽은 다음에 널리 읽었으면 좋을 것 같아 열권을 더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