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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선언문/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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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선언문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를 열면서

우리는 80년대의 격변을 겪으면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민족통일을 이루어나갈 주체와 그 제약요인을 새롭게 확인해 내었다. 이제 우리는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이 지닌 자주성과 역동성을 드높이고 그것을 하나로 결집하여 이를 수행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실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역사적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실 변혁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한국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은 연구자들의 급격한 양적 팽창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많은 연구자들이 제도 학계 주변에 퇴적되어, 기존의 학계 밖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활동의 장을 만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식인 특유의 소시민성에 기인하는 연구와 활동의 분산성과 고립성은 이러한 활동에 장애요인이 되었다.

이에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극복하고 시대적 과제의 해결에 주체적으로 동참하고자, 일련의 집단적 조직적 대응을 모색하여 일정한 성과를 모색하면서, "민중사학의 건설"를 기치로 내걸고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역사연구자들은 현실 사회의 요구를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구체적인 사회적 존재조건과 옳게 결합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우리는 그간의 활동경험과 성과를 정리해 내면서 이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값진 경험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정리의 과정에서 기층민중과의 접촉공간을 확대하고 우리 스스로의 인적, 물적 재생산 기반을 확보해 내는 것이 연구자들의 실천성과 그 실천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기초 조건임도 거듭 확인하였다. 오늘 창립될 구로역사연구소는 이런 점에서 지난날 활동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재기의 결과이며, 우리 자신을 단련시켜나갈 실천의 장이 될것이다. 이제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고자 한다. 구로역사연구소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민중주체의 입장에서 연구하고 민족통일의 참 방향을 열기 위해 민족사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 정리해 내는 일에 온갖 힘을 쏟아 부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연구결과를 검증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중사학의 이론적 진전은 물론 사회운동의 과학적 전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활동을 우리와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해나갈 것이다.

일천구백팔십팔년 십일월 십이일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연구원 일동

연혁

1. 연구소의 출범

1987년 6월투쟁과 노동자대투쟁의 거센 바람이 휘몰고 간 직후인 1988년 11월 '구로역사연구소'(이하 구로연)는 창립되었다. '구로'라는 노동운동의 상징성을 연구소의 명칭으로 채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구로연은 '역사적 실천'을 위하여 실천의 현장에 세워졌다. [창립선언문]에서는 구로연의 목표를 "우리 민족의 역사를 민중주체의 입장에서 연구하고 민족통일의 참방향을 열기 위해 민족사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 정리해 내는 일에 온갖 힘을 쏟아 부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연구결과를 검증받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중사학의 이론적 진전은 물론 사회운동의 과학적 전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설정하였다.
구로연의 출범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숨어 있다. 구로연은 1984년에 세워진 '망원한국사연구실'을 모태로 한다. 한국사 연구자와 다른 분야의 연구자가 결합한 망원한국사연구실은 "민중 중심의 역사 연구, 서술과 그 성과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한국사 연구와 연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1987년 '한국근대사연구회'와의 통합 논의를 계기로 분열되었으며, 결국 한쪽은 한국근대사연구회와 통합하여 '한국역사연구회'를 창립하고, 다른 한쪽은 구로연을 창립하는 방식으로 분리되었다. 이 과정은 학술운동의 관점, 학술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결합방식, 연구자의 조직문제 등 다양한 쟁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나, 크게 보면 한국사 분야에서 '연구자 대중'의 조직화를 중심적인 과제로 놓느냐 아니면 민중운동과의 결합을 통한 한국사 연구자들의 실천성 강화를 중요한 과제로 놓느냐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었다. 구로연의 출범은 비록 막연한 형태이지만 민중운동과의 결합을 통하여 연구자의 대중성과 실천성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문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진보적인 한국사 연구자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어디에 어떠한 방식으로 두어야 하는가라는 쟁점에 대한 나름대로의 문제제기였다.
창립 당시의 연구원은 13명이었고, 연구분과로 전근대분과, 이행기 제1연구분과(근대민중운동사팀), 이행기 제2연구분과(의병연구팀), 현대사 연구분과를 두었다. 연구소의 지향은 회보의 특집에서 드러난다. 제1호(1989.3)에서는 [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를 특집으로 메이데이 100주년을 맞아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의 노동절 쟁취 선언을 뒷받침하였으며, 제2호(1989.11)에서는 [우리나라 지방자치제의 역사]를 특집으로 민중의 절절한 요구에서 나온 지방자치의 역사성, 민중 권리의 신장과 민중의 정치적 지향을 조명하였다. 그리고 3호(1990.9)에서는 [우리나라 근현대 지배 이데올로기]를 특집으로 지배세력이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책 등 여러 수단을 사용하여 선전해온 주요 논리--단군, 민족, 근대화, 성장, 발전, 반공 등--의 본질을 검토하였다.


2. 민중사학의 대중화

연구소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과 활동은 민중사학의 대중화작업이었다. 집단적 공동작업을 통하여 민중사학의 성과물을 생산하고 그 성과물을 다양한 방법과 경로를 통하여 대중에게 전달하고, 그 과정에서 연구소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검증받고자 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창립직후부터 민중사학에 입각한 대중교과서의 집필에 들어가 1990년 2월에 {바로 보는 우리 역사}(1.2)를 발간하였으며, 회보의 체제와 성격, 제목을 바꾸어 {함께 보는 우리역사}를 1992년 3월부터 매달 발간하여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혀 나갔다.
더불어 대중 교육사업을 활발하게 실시하였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가는 수많은 강의는 생략하더라도 굵직굵직한 강의만을 들어보면, 정신여고 평교사회 역사학습(1989.1), 춘천YMCA 춘천사회선교센타 주최 민족학교(1989.1-2), 진보정치연합 안산지부 주최 안산시민학교 제1기 한국사강좌(1989.4-6), 신관중학교 교사 역사이해(1989.7-8), 한국방송통신대학 서울지역총학생회 주최 제1회 민족민주교실 한국근현대사강좌(1989.8-9), 수원사랑민주청년회 주최 제3회 수원사랑민주교실 현대사강좌(1990.2-3), 인천민중연합 주최 제1기 민중역사교실(19903.-4), 구로국민운동본부 주최 역사강좌(1990.3-4), 민중당 인천남구을지구당 주최 제1기 민중역사교실(1991.1-3), 동두천민주시민회 주최 제1회 시민역사교실(1991.4-5), 교보문고노동조합 주최 한국사교실(1991.8-10), 서울민중연합 한국사강좌(1992.7-8), 민중회의 서부지구 식민지시기 사회주의운동사 강좌(1992.8),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한국사강좌(1992.10-11), 안양 민주청년연합 부설 청년대학 제4기 한국사교실(1992.10-11), 건설 일용 노동조합 한국근현대사 강좌(1993.2-3), 성남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한국사강좌(1993.4-5), 중부민주청년회 한국사강좌(1993.4-5) 등이 있다. 이러한 대외교육은 연구성과를 대중에게 직접 전달하는 동시에 연구자들이 현실의 변혁운동과 연계를 맺는 중요한 고리로 여겨져 연구소의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역사분야의 특징을 살려 역사기행을 실시하였다. 제1회 역사기행(1993.2)에서는 '한국현대사와 지리산 남부군의 삶과 활동'이라는 주제로 지리산 일대를 답사하였으며 제2회 역사기행(1993.5)에서는 '한국현대사와 지리산2'라는 주제로 지리산 빗점골 일대를 답사하였다. 제3회 역사기행(1993.10)부터는 주제를 갑오농민전쟁으로 바꾸어 '1894년 농민전쟁, 구례 남원 농민군의 활동과 김개남'이라는 주제로 남원과 지리산 자락을 답사하였다. 또한 대중화작업의 일환으로 일반 회원제도를 이용하여, 1992년 4월경에는 일반회원이 400여 명에 달하였다.
창립에서 1992-3년에 이르는 시기는 활발한 연구 작업과 대중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역사의 대중화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전문성을 만들어 나가고자 모색하던 시기였다.


3. 혼돈과 전환, 그리고 침체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민중사학을 기반으로 삼던 구로연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충격에 갑자기 직면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충격의 여파가 연구원들 사이로 서서히 스며들었고, 몇 가지 계기를 통하여 밖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기는 언제나 연구의 전문화라는 생각과 결합되면서 드러났다.
회지 {역사연구}의 발간이 진행되면서 하나의 계기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회지가 처음 제안된 것은 연구소가 발족한 직후였다. 한편으로는 현장교육의 경험을 연구성과로 재생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내외적으로 연구소의 위상을 정립하고 일상적 연구역량을 높일 목적으로 전문연구지로서의 회지가 제기되었으며, '전근대 유민층의 발생과 민중항쟁'이라는 특집을 중심으로 회지의 발간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준비과정에서 특집이 폐기되고 개별 논문을 집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개별 논문의 집필도 어려움에 부딪쳐 1992년 5월에서야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당시의 고민은 창간호에 실린 소감에서 잘 나타나있다. "···이러한 상황(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필자) 속에서 그동안 우리가 내세웠던 민중 주체의 과학적인 역사연구의 진정한 내용은 무엇이며, 또 실천적 내용이 뒷받침되지 못할 때 이러한 주장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논문집은 그 형식으로만 본다면 기왕의 일반 학술논문집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역사적 책무에 더욱 분명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러한 논문집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창간호를 내면서]) 이후 {역사연구} 2호(1993.11), 3호(1994.7), 4호(1995.10), 5호(1997.10)가 발간되지만 연구자의 개별 연구성과를 묶어 놓은 논문집 형태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초기에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새로운 전문성', 즉 실천의 경험이 연구 작업에 반영된 연구성과의 형성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전문성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났던 변화의 계기가 더욱 증폭된 것은 연구소 명칭의 변경을 통해서이다. 1993년 초에 연구소 명칭의 변경이 제기된 것은 한편으로는 구로연이라는 명칭이 지역적인 한계를 지닌다는 점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로'라는 상징성이 가지는 의미가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연구원들의 격론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면서 1993년 8월 구로역사연구소를 '역사학연구소'(이하 연구소)로 바꾸었다. 연구소의 명칭을 변경하면서 낸 글에서는 전문성의 강조가 잘 나타나 있다. "···나라 안팎의 정세가 급변하는 요즘, 역사 연구자에게도 새로운 자세와 의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곧 과학적인 역사 연구방법을 새롭게 모색하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도움되는 역사 연구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성과를 다시 평가하고 아울러 다른 학문 분야와도 긴밀하게 교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뜻을 담아 우리는 연구소 이름을 '역사학연구소'로 바꾸었다. 앞으로 '역사학연구소'는 연구성과를 가지고 대중과 만나는 한편 과학적인 역사학을 정립하는 데 더욱 힘쓸 것이다."([연구소 이름을 바꾸며]) 이제 초기의 민중, 실천, 과학이라는 지향은 과학적인 연구라는 전문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1992-3년을 계기로 하는 전문성의 강조로의 전환은 진보운동의 퇴조에 따른 대중교육의 위축이라는 정치적 조건과 결합하면서 연구소의 활동은 침체되어 갔다. 초기의 대중화작업에 기초한 새로운 전문성의 모색이 벽에 부딪히고 이에 대한 반대 편향으로 기존의 전문성이 부각되면서 연구소의 활동은 연구와 교육 모두 침체되어 갔다. 분과별 연구활동과 기획물 간행은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관성적으로 수행되었으며, 대중교육도 개별적으로 외부의 요구에 응하는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 새로운 방향의 모색

연구소는 1998년 11월로 창립 10주년을 맞이하였다. 진보적 학문의 정체성 위기 속에서 외환 위기의 급습은 진보적 학문의 위기를 초래하였으며, 역사학 분야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비로소 희망을 볼 수 있듯이 진보적 역사학도 존폐의 기로에서 비로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다.
연구소는 연구와 교육이라는 두 축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연구의 측면에서는 지난 10년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했다. 1980년 이후의 공산주의운동사 연구를 정리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 -현황과 전망-}을 1997년에 발간하고, 이어 {한국 근현대 사회 변혁 운동}도 출간하였다. 이듬해에는 {식민지 경제구조와 사회주의 운동}을 발간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쌓아온 연구소의 성과를 재정리하고, 새로운 세기에 맞는 새로운 역사 쓰기를 고민하고 시도하였다. 2004년에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와 {바로 보는 우리 역사}, {메이데이 100년의 역사}를 개정하여 출간하였고, {역사 속의 미래 사회주의}(2004), {노동자, 자기 역사를 말하다}(2005)를 출간하여 새로운 역사 쓰기와 관점을 타진하였다. 또 2008년 11월에는 연구소 창립 20주년 심포지엄 [위기에 선 역사학: 민중사의 새로운 모색]을 개최하여, 위기의 현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농민전쟁 115주년을 기념하여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회지 {역사연구} 또한 꾸준히 발간하였다.
교육의 측면에서는 '역사학교준비위원회'를 설치하여 대중교육의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연구소의 역사기행을 준비하고, '역사와 산'이라는 산행팀을 운영했으며, 비디오, 슬라이드 등 다양한 강의방식을 모색하였다. 물론 이러한 모색 모두가 희망찬 전망이나 뚜렷한 대안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연구 방향과 대중운동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면서

2010년대 한국연구재단의 등재지/등재후보지 시스템의 강화와 새로운 회원 가입의 정체 등으로 연구소는 다시 침체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2008년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의 결과물을 모아 2010년에 {한국 민중사의 새로운 모색과 역사쓰기}를 출간하였다. 그와 더불어 장기간 중단되었던 ‘토론마당’도 재개하여 2010년 2월 [‘변혁주체 민중론’,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술행사를 진행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여러 연구소와 함께 한국사 교과서와 교과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1월에는 전태일재단과 심포지엄을 공동주최하여 노동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계속 이어나갔다.
2012년에는 [현대 한국의 스파이담론과 정치사회적 효과]라는 제목의 연구발표회를 개최, 한국 현대사에서 스파이 담론이 어떻게 작동하였는가를 검토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역사4단체가 연합하여 유신시대를 검토하는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라는 연합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2013년에는 ‘묵재일기’를 중심으로 16세기를 살펴보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도부터는 연구소가 다루는 연구 주제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2013년 가을 정기 심포지엄과 2014년 상반기 정기학술대회의 주제는 [근대사회와 일상의 리듬]로, 일상의 차원에서 근대성을 재검토하였다. 특히 이 학술대회는 연구소 내 세미나팀 연구 활동의 결과로 진행된 것이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각각 [역사 연구·쓰기와 비문자 매체], [담론과 담론의 주변: 사상, 개념, 상징]이라는 제목으로 이전까지 연구소에서 다루지 않았던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역사3단체의 연대활동도 계속되었다. 2015년 8월 [역사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이라는 주제로 연합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당시 논란을 일으켰던 국정화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도 공동 대응해왔다.
연구소의 대중사업 또한 새로운 기점을 맞았다. 2016년 4월 19일부터 대중강의를 표방하는 ‘역사서당’ 강좌를 개설, 총 3강좌 8주 강의를 운영하고 마지막 주차에는 현장답사를 포함하여 적극적인 대중사업을 표방하였다. 현재 역사서당은 6기를 개설하여 계속 진행 중이다. 출판물도 새로운 시대에 맞춰 개정 및 재출간하였다. 2016년에 {교실밖 국사여행}과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를 개정하여 출간하였다. 특히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는 임시정부 수립이나 일본군 위안부 부분을 대폭 보완하였고, 현대사 마지막 부분에는 참여정부 역사까지 포함하였다. 개정 과정에서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하였고, 책의 구성 또한 대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방향으로 재편집하였다.
연구소의 회지 {역사연구}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16년부터 {역사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지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회지의 외연을 확장하고 연구소 내부 구성원의 원고 투고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 등재지로 승급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시각으로 준비할 예정이다. 동시에 등재후보지 혹은 등재지 선정과는 별개로 회지의 연구논문들이 학계는 물론 사회의 주요 이슈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가능성을 주창할 수 있는 공론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2018년, 역사학연구소는 창립 30주년을 맞이한다. 연구소는 이를 맞아, 결코 짧지 않은 이 기간을 다시 돌아보고 발전을 위한 반성의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다양해졌으며, 노동문제는 파편화되어 문제화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학이, 그리고 역사학연구소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연구소는 이 곤란하고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와 대중화 사업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모색할 것이다.